Texte original : 1-9. 단발과 근대성 (논쟁으로 읽는 한국사)

단발령 공포의 배경

 

1895년 11월  15일 (음력), 개화파 정부는 이틀 뒤 17일을 기해 건양建陽 연호를 사용하여 양력을 도입하고 (1896.1.1) 단발령을 시행한다고 발표했다.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은 서구열강이 강요한 불평등조약체제를 극복하고 자본주의적 발전을 이루기 위해 대륙침략 또는 조선침략을 구상했다.   1876년 강화도조약을 강요한 이후 일본은 청나라를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 국제질서를 변화시키려 했다. 일본은 청나라의 영향에서 조선을 분리시키려 했고, 이를 둘러싼 청 - 일 양국의 대립은 1894년 청일전쟁으로 발전했다. 청일전쟁은 일본의 승리로 끝났고, 일본은 동아시아 국제질서 재편을 주도하게 되었다.

 

일본이 주도하는 동아시아 국제질서 재편은 곧 조선침략으로 이어졌다. 일본은 조선에 '내정개혁'을 강요했다. 그리고 자신의 조선침략과 내정개혁 강요를 "청나라로부터 조선을 자주독립"시키는 것, 근대화를 돕는 것으로 미화했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뒤 일본의 내정간섭이 더욱 노골화된 1895년 초부터 소위  2차 갑오개혁이 시작되었다. 1894년   12월  12 일의  "홍범   14조"  공포이후 별 문제없이 '개혁'이 추진되었다. 특히 1895년 3월 23일의 시모노세키조 약을 통해 청나라와 조선의 속국관계가 완전히 청산되면서, 개혁은 더욱 순조롭 게 진행될 수 있었다. 그러나 조선을 청나라에서 분리시키고 1894년 6월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과 동시에 민씨 정권을 붕괴시켜 청나라와 연결되어 있던 민영준 일파를 제거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민비를 중심으로 한 일련의 정치세력들은 러시아 - 미국 등과 다시 손잡게 되었다. 러시아는 3국간섭을 주도해 일본으로 하여금 조선에서의 권리를 포기하도록 만들었다. 일본은 다시금 등장해 친러배일정책을 추진하는 민비 중심의 정치세력을 제거하지 않을 수 없었고, 끝내 민비를 시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러나 미국 - 러시아의 외교관들은 민비 시해의 주범이 일본인임을 목격자들 을 통해 알게 되고, 그 사실을 거론하기 시작했다. 일본은 더욱 궁지에 몰렸으며, 어떻게든 을미사변을 수습해야 했다. 을미사변의 범인들을 재판 - 처벌하고 왕후의 복위와 국장國葬을 추진했다. 하지만 을미사변을 객관적으로 공정하게 처리하는 척했을 뿐, 실제 범인은 밝혀지지도 않았고 처벌받지도 않았다. 오히려 왕후 시해사건 가담자들이 무죄가 되었다. 한편 개화파 정부는 자주독립 사업과 개혁정치를 추진해나갔다 그것은 1896년 1월부터 건양 연호 사용, 양력 사용으로 구체화되었고,  단발령으로 상징화되었다.

단발령 공포와 강제단발 시행

 

단발령은  1895년  11월  15일 조칙과 내부고시를 통해 공포되었다. 단발령이 공포되는 날 새벽, 고종과 태자는 농상공부대신 정병하鄭秉夏와 내부대신 유길준 두 사람에 의해 강제로 머리를 깎였다. 모범을 보인다는 이유에서였다. 다음날인 11월 16일에는 관료들이 머리를 깎았고, 양력으로 1월 1일이 되는 17일부 터 서울에서는 경무사 허진許璡의 지휘 아래 순검들이 거리에서 강제로 사람들의 상투를 잘라냈다. 각 관찰부에 상투 자르는 관리 剃頭官 를 파견하여 날을 정해 머리 깎을 것을 독촉했고, 경무관과 순검들로 하여금 강제로 머리를 깎게 했다. 월 일에는 양력 사용, 연호 사용, 복색제도 개혁, 단발 등에 관한 조칙이 다시 내려졌다.

 

11월 15일의 조칙에서 고종은 "짐이 머리카락을 잘라 신민에게 모범을 보이니 너희들은 짐의 뜻을 받들어 만국과 함께 병립하는 대업을 이루게 하라"고 했다. 같은 날 유길준은 내부고시를 통해 고종이 대분발하여 단발에 관한 조칙을 내렸다는 것, 위생에 이롭고 일을 함에 편리하기 위해 표준을 보인다는 것, 국가와 백성의 부강을 도모하고 정치개혁을 도모하기 위해 솔선하여 시행한다는 것을 밝혔다. 단발과 함께 망건도 폐지했다. 1월 11일의 조칙에서는, 상투와 망건은 원래 우리에게 없던 것으로 고유의 것이라고 할 수 없는데 일하기에 불편하고 양생하기에 불리하며 배와 차가 왕래하는 오늘날 홀로 쇄국하던 구습을 지킬 수는 없다, 백성이 부강하고 군대가 강하지 않으면 선왕의 종사를 지키기 어렵다, 선왕의 제도를 변경하지 않고도 종사를 지키는 길이 있다고 하는 주장은 천하의 대세를 모르는 것이다, 복색을 바꾸고 단발함은 "백성의 이목을 일신케 하여 구습을 버리고 짐의 유신하는 정치에 복종케 하는 것"이라고 했다. 결론적으로 머리카락과 구습을 함께 잘라낼 것을 요구했던 것이다.

 

단발을 강제하는 측이 내세운 논리는 편리함, 위생적임, 구습을 버리고 새로운 시대임을 자각시킴, 다른 나라들과 동등하게 되기 위함, 개혁을 위한 마음가짐(다짐) 등이었다. 상투는 두통을 일으키고 망건은 머리를 속박하니 폐지해야 한다고 했다. "말총으로 엮은 그물을 머리에 동이지 아니하고 남에게 잡혀 끄어들이기 쉬운 상투를 없애고 세계 인민들과 같이 머리부터 우선 자유롭게 하라"는 것이었다.

단발반대 상소와 의병봉기

 

강제단발은 교통요지에서 길을 막아 사람들의 통행을 중지시키고 서울 성안 의 생필품 공급을 중지시켰으며 상업유통을 방해했다. 심지어 외국과의 교역도 영향을 받았다. 그런 가운데 전국 각지에 단발반대 상소청이 만들어졌다 단발령이 내려지자 1895년 11월 16일 학부대신 이도재李道宰가 제일 먼저 단발령반대 상소를 올렸다. 일주일 뒤인 1896년 1월 7일 (음력 11월 23일)에는 김병시金炳始가 단발령 취소를 요구하는 상소를 올렸다. 1896년 1월 13일에 예안에서 강릉, 평창, 정선 등지 향교로 통문이 보내졌던 것으로 보아, 이 시기 영남과 강원도 지역에 단발반대 상소청이 군 단위로 설치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단발반대 상소와 통문 등이 나돌자 개화파 정부는 즉각적인 조치를 취했지만, 각 지역에서 단발반대 의병이 봉기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1896년 1월 4일 최익현이 포천에서 거사를 시도한 것을 시작으로, 춘천 - 제천 - 여주 - 이천 - 광주 (경기도) - 홍주 - 안동 - 진주 등 널리 알려진 의병봉기 지역 외에도 경기 동북부 지역 (이 지역 의병봉기는 최익현의 영향으로 보인다)의 포천 - 영평 - 마전 - 연천 - 가평 등지와 강원도 철원 - 낭천 (현 화천) - 양구 - 금화 - 금성 - 회양 - 평강 등지, 함경도 전지역 (당시 함경도는 함흥관찰부, 갑산관찰부, 경성관찰부 등으로 되어 있었다), 영동 9군을 관할하는 강릉부, 호남 나주 등지에서 단발반대 의병이 봉기했다. 단발반대 의병은 단발거부에머물지 않고 단발령을 강행하는 관리, 특히 경찰관리를 공격하여 단발령을 중지시키려 했다. 심지어 단발한 사람들까지 공격했다.

 

이도재는 단발에 대해 "단군 기자 이래로 머리를 땋던 풍속이 높게 상투 트는 풍속으로 변했고 머리카락을 아끼는 것을 큰일로 여겼습니다. 이제 만약 하루아침에 깎아버린다면 4천 년 동안 굳어진 풍습을 변화시키기 어렵고 억만 백성의 흉흉해하는 심정을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니 어찌 격동시켜 변란의 계기를 만들지 않는다고 믿을 수 있겠습니까" 라고 했다.

 

김병시는 단발이 고종의 뜻이 아니라는 것, 춘추의 의리에 어긋난다는 것, 기자의 팔조금법八條禁法 이후 성인의 훌륭한 법속과 선왕의 훌륭한 제도를 버리는 일이라는 것, 조정의 신하들에게 널리 묻지 않았다는 것, '몸과 머리터럭 과 피부는 부모에게서 받은 것으로 감히 훼손하거나 손상할 수 없다'는 공자의 가르침에 어긋난다는 것 등의 이유를 들어 단발령의 취소를 요구했다.

 

1895년 11월 29일의 예안 통문에서는 군부의 머리카락에 감히 칼을 대어 깎고 온나라에 단발령을 내렸는데 그 옳지 못한 명령 (단발령) 에 복종할 수 없다는 것, 머리털은 부모에게 받은 것이니 죽음이 두려워 머리를 깎을 수 없다는 것, 머리를 한번 깎게 되면 선왕의 백성이 모두 오랑캐가 되고 성인의 옛 나라가 짐승의 나라가 되고 말 것이니 차마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 등이 이야기되었다.

 

의병 측의 격문과 상소를 통해 단발반대자들이 단발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이들은 고종과 태자의 강제단발이 을미사변 못지않은 변괴라고 생각했다. 또 상투 자르기를 일본화하는 것, 국가의 명맥을 끊는 것으로 보았다. 문명이 변해 야만이 되고, 사람이 변해 오랑캐나 짐승이 되는 것으로 보았다. 성인의 전통 (왕도정치), 도학의 명맥, 역대 선왕의 예절과 문물이 하루아침에 무너지는 것, 천지가 번복되고 천하가 깜깜해 지는 것으로 보았다.

 

이들은 국모의 원수를 갚고 국왕의 치욕을 씻는 일도 물론 중요하지만 중화와 오랑캐의 구분이 임금과 신하의 의보다 더 중하다고 보았기 때문에, 부모의 유체를 보전하고 선왕의 법복을 지키는 것이 제일 급선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목을 끊을망정 머리카락을 끊을 수는 없었고, 몸은 삭아도 이름을 삭일 수는 없었다. 나라치고 망하지 않는 나라는 없기에 머리를 깎고 나라를 보존하는 것보다 차라리 머리를 보존하고 나라가 망하는 것이 더 낫고, 사람치고 죽지 않는 사람은 없으니 머리를 깎고 사는 것보다 차라리 머리를 보존하고 죽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상투를 잘리고 자결했다. 결국 이들에게는 머리카락을 지키는 것이 중화예의의 문명을 지키는 것이었다.

단발령 취소

 

1896년 2월 11일 러시아공사관으로 이어함으로써 고종은 위험한 고비를 넘기게 되었고, 친일 김홍집 내각이 붕괴되었으며, 의병참여세력의 일부인 친러 개화파가 집권했다. 따라서 단발령 역시 취소될 법했으나, 친러 개화파 정부 역시 단발령을 즉각 취소하지는 않았다. 단발령에 관한 친러 개화파 정부의 공식조치는 2월 18일 내부대신 훈시를 통해 "단발하는 건은 편리함을 좇으라"고 하면서 의병해산을 권유한 것이었다.

 

그러나 의병들은 "편리한 대로 따르라" 는 새 정부의 지시에 만족하지 않고, 칙령을 내려 단발령을 취소하기를 요구했다. 칙령에 의한 단발령 취소는 단발반대를 위해 봉기한 의병들의 정당성을 인정하는 것이었고, 일종의 사면조치였다. 단발반대 의병이 정당하다면, 머리 깎기를 주장한 괴수는 사형에 처하고 도당은 귀양을 보내야 한다고 요구했다.

 

단발에 관한 한 친러 개화파 정부 역시 친일 개화파와 별로 다를 게 없었다. 친일 개화파 정부 시절이었던 1896년 1월  22일에도, 당시 내각은 영남 선비들에게 단발령은 원래 억지로 머리를 깎으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깨닫고 시행하는 것이라는 지시를 내린 바 있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1896년 2월 11일 춘천의병해산 조칙에서 춘천 의병의 봉기원인을 단발령이 아닌 8월 20일의 변(을미사변)으로 규정함으로써, 을미사변을 복수하려는 의병에 대해서만 사면조치를 내리고 단발반대 의병에 대해서는 공식 사면조치를 내리지 않았다. 이런 상황이 었기 때문에 아관파천 이후에도 단발반대 의병은 계속 활동할 수밖에 없었고, 의병 측은 단발령을 공식 취소하라고 요구했던 것이다.

 

최익현은 1896년 2월 20일 의병을 선유하는 선유대원으로 임명되었는데, 2월 25일 상소를 올려 의병해산의 부당함, 왕후의 죽음에 대한 복수, 단발령 취소 등 세 가지를 말하면서 선유에 나서지 않겠다고 했다. 이후 단발반대 의병들은 여러 차례 단발령 취소를 요구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최익현 등 의병 측의 줄기찬 요구에도 단발령을 취소하지 않았던 것은, 아관파천 이후 새로 집권한 친러 개화파 정권 역시 단발 문제를 상당히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895년 11월 15일의 단발령이 조칙으로 취소된 것은 1897년 8월  12일이었다. 이는 대한제국 출범 직전이었는데, 단발령의 취소와 함께 유인석 - 노응규盧應奎 등 단발반대 의병세력에 대한 사면이 동시에 이루어졌다.

단발령의 역사적 성격

 

단발령은 1894년 6월 21일 일본군의 경복궁 침입 이후 조선에 대한 내정간섭 의 결정체였으며, 고종의 왕권이 위기에 처했음을 나타내는 상징적 사건이었다. 따라서 단발을 긍정적으로 보든 부정적으로 보든, 단발 자체에 대해서보다는 정권유지와 관련해서 단발 문제를 거론할 수밖에 없었다.

 

'단발은 편리하고 위생적'이라는 논리에는 상당한 근거가 있었다. 그러나 이는 정상적인 개혁 과정에서 장점을 부각시키면서 시행되지 못했다. 을미사변 으로 민심이 극히 흉흉해진 가운데 집권세력이 점차 불리해지자, 그런 상황을 역전시키기 위해 취해진 무모한 시도였다. 을미사변도 무마하고 근대개혁도 추진할 수 있다면 친일 개화파는 정권 안정을 가져올 수 있을 것이었고, 일본은 '민비살해'라는 국제적 범죄를 감출 수 있었다 그리고 고종의 왕권은 갈수록 무력화될 것이었다.

 

단발반대 의병들은 대개 '복수보형復讐保形'을 표방했다. '복수'는 왕후시해에 대한 복수를 의미했고 '보형'은 단발령에 반대하여 머리를 깎지 않고 형체를 보존한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목숨을 걸고 머리카락을 지킨 것은 일본침략에 대해 목숨을 걸고 저항한 근대 민족주의운동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이 지키려 했던 것은 중화문명이었고, 소중화였으며, 개혁으로 무너진 성리학적 질서였다. 이 점과 관련하여 의병들이 명과 청나라 연호를 사용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이들은 1881년대 이미 무너져버린 중화체제 를 계속 고집하여 중국에 의존하려 했으며, 근대사회의 발전에 따라 무너져버린 성리학적 질서를 다시 일으켜 세우려 했던 보수반동적인 흐름이었다.

 

단발령에 이르러 정세는 두 정치세력의 무력대결로 발전할 수밖에 없었는데, 보수반동적 저항을 불러일으키고 그 보수반동적 흐름이 '국가'와 '민족'을 명분으로 침략에 대한 저항이라는 정당성을 획득할 수 있게 만든 것은 분명 대외의존적 정권이 가질 수밖에 없는 한계였다. 더구나 갑오농민군이라는 혁신세력을 무력으로 토벌한 것은 '개혁'의 지지기반을 스스로 상실함과 동시에 필연적으로 보수반동세력의 저항을 불러올 수밖에 없었다. 

Academy of Korean studies Inalco Université Paris Diderot-Paris 7 EHE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