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elier de traduction : 한양가

Texte original:

한양가는 19세기 전반 서울의 문물제도와 풍속을 읊은 국문 가사로, 1840년 한산거사가 지은 것이다. 지은이 한산거사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1949년 한양가를 최초로 교주한 송신용은 한양가의 내용중 야정서에 대한 찬양이 훨씬 상세하고 두드러진다는 점을 토대로  조대풍요, 풍요경전, 풍요삼전에 든 인사 중의 한 사람이나 또는 그의 후예로 추측하고 있다.

한양가의 판본은 현재 다양하게 전해 내려오고 있다. 歲在甲辰李春(1840년 3월) 한양거사가 지은 한양가에 신증동요와 고종 10년(1874) 순종의 탄생을 경축하여 지은 갑술경가를 덧붙여 1880년 석동신간으로 간행된 활자본이 가장 대표적인 것이고, 필사본도 여러 종류가 전해지고 있다. 필사본으로는 아악부가집엔 한양풍물가로 실려 있으며, 가람 이병기 소장본인 거노불화가에는 한양태평가로 실려 있다. 규장각 소장본도 필사본으로 제목이 한양가로 되어 있다.

한양가는 각 판본에 따라 내용상 약간의 차이가 나타난다. 1880년 간행된 활자본의 콰장 묘사는 문과 장면만 나타나 있지만, 규장각 필사본에는 문과 외에 47행에 이르는 무과 장면이 추가되어 있다. 특히 추가된 부분중에 "신군위의 정병들은 ..... 조선국기를 높이 달고"라는 구절이 보이는데, 이는 친군위의 군사훈련 때 국기가 사용되었음을 알려주는 중요한 기록이다.

한양가의 내용은 크게 13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1) 한양의 지세와 도색으로서의 형국을 노래한 부분, (2) 한양의 궁전과 누각, 보탑을 묘사한 부분, (3) 궁궐의 내시와 무예별감, 내인들이 왕을 시위하는 모습, (4) 승정원과 의정부의 모습, (5) 육조 관아의 모습, (6) 조마거동과 여러 관서의 모습 (7) 선혜청과 여러 관서의 모습, (8) 한양 도성의 각 성문과 시장의 모습, (9) 각종 놀이와 그 놀이가 주로 행해졌던 명승지의 모습 (10) 각종 복식과 기생점고, 가무 모습, (11) 왕의 수원 능행 광격 (12) 문, 무과 시험 광격과 함께, 마지막으로 (13) 한양이 도읍으로서 천하 제일이며, 앞으로 영원할 것이라는 내용의 한양 예찬으로 노래를 끝맺고 있다.

이러한 여러 부분 중에서 가장 압권은 시장 풍경을 묘사한 부분이다. "팔로를 통하였고, 연경일본 다 아는구나 우리나라 소산들도 부끄럽지 안컨마는 타국물산 교합하니 백객전 장할시고"로 부터 시작되는 시전에 대한 묘사는 다른 어떤 자료보다도 가장 구체적이고 생생한 서울 시장의 풍경을 전달하고 있다. 육의전 중에 제일 우두머리였던 선전에서 판매되는 비단만도 30여 종류가 나열고 있고, 이외에 어물전, 백목전, 지전, 청포전, 포전에서 판매되는 각종 어물과 생선, 무명, 종이, 중국산 모자, 삼베의 종류 등이 모두 나열되고 있다. 또한 종로의 시전만이 아니라 남대문 밖 대표적인 난전거리였던 칠패시장에서 판매되는 생선과 과일류, 그리고 길거리에 노점 형태로 저자를 벌였던 도자전에서 판매되는 수많은 부녀자들의 노리개 종류, 서울 시내 12곳에 설치되어 잡화를 판매했던 목전의 모습 등도 세밀하게 묘사되고 있다. 한양가에서 그려진 시장풍경을 보고 있노라면 마치 서울에 대한 방물지를 보는 듯한 느낌을 갖게 된다.

이 한양가를 통해 우리는 서울이 조선왕조의 수도로서 왕궁과 주요 관서가 위치한 정치, 행정 중심지로서의 위엄과 품격을 갖췄을 뿐 아니라, 일반 서민들이 활기차게 삶을 꾸려 갔던 매우 번성한 상업되시였음을 실감할 수 있다.

흔히 서울 600년을 이해할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1394년 조선 왕조의 서울로 정해진 이래 거의 변화없이 서울의 도시구조가 유지되었고, 이와 같은 중세적 도시 형태가 일제 침략에 의해 근대적인 도시로 변화되었다고 이해하기 쉽다. 그러나 조선시기 우리 역사가 그와 같은 정체적인 모습을 갖지 않았듯이 서울이라는 도시도 600년 동안 많은 변화와 발전을 거듭해 왔다. 서울은 정도 이래 조선사회의 변화 발전을 가장 잘 반영하는 도시였다. 한양가에서 표현된 서울의 풍속과 문물제도는 바로 조선 500년 역사에서 이룩해 낸 변화 발전의 정수라고 봐도 큰 무리가 없을 것이다.

시장 풍경만이 아니라 다른 부분들도 서울의 고유한 문화와 풍속을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이러한 생생하고 구체적인 묘사는 다른 기록류에서 결코 찾아보기 어렵다. 가람 이병기 선생은 이 한양가를 "유성앙서에 못지 않을 뿐 아니라, 우리 민족의 정신 및 문화적 혈통을 우리에게 명백히 보이고 있는 작품"이라고 평가한 바 있다. 한양가는 19세기 서울의 생생한 모습을 글로 풀어 쓴 풍경화로서, 그 문학적 성취만이 아니라 민속사나 생활사, 상업사 연구에 없어서는 안될 귀중한 문헌이다.

한양가는 송갑용씨가 1880년 목활자본으로 간행된 것을 저본으로 하여, 동상전에 종사했던 상인 조선시대 관직을 역임했던 사람, 목순 행상 그리고 실제 한양가에서 표현되는 서울 거리에 대한 실지 답사 등을 통해 그 내용을 자세히 교주하여 1949년 정음문고로 편찬하면서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 후 1974년에 박성의씨가 송신용의 교주본을 저본으로 하여 순한글고어체 문장을 현재 우리가 쓰는 글투로 바꿔 민중서관에서 출판하였다. 지금 규장각에서 병풍으로 제작하여 전시한 한양가는 바로 박성의씨가 교주한 것을 바탕으로 삼아 제작한 것이다. 이번 영인본은 위 규장각전시용 병풍과 규장각 소장 한양가 두 종류를 실었다.

 

 

Traduction(s)

Ballade de Hanyang

Texte original

Traduction

한양가는 19세기 전반 서울의 문물제도와 풍속을 읊은 국문 가사로, 1840년 한산거사가 지은 것이다. 지은이 한산거사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1949년 한양가를 최초로 교주한 송신용은 한양가의 내용중 야정서에 대한 찬양이 훨씬 상세하고 두드러진다는 점을 토대로  조대풍요, 풍요경전, 풍요삼전에 든 인사 중의 한 사람이나 또는 그의 후예로 추측하고 있다.

한 양가의 판본은 현재 다양하게 전해 내려오고 있다. 歲在甲辰李春(1840년 3월) 한양거사가 지은 한양가에 신증동요와 고종 10년(1874) 순종의 탄생을 경축하여 지은 갑술경가를 덧붙여 1880년 석동신간으로 간행된 활자본이 가장 대표적인 것이고, 필사본도 여러 종류가 전해지고 있다. 필사본으로는 아악부가집엔 한양풍물가로 실려 있으며, 가람 이병기 소장본인 거노불화가에는 한양태평가로 실려 있다. 규장각 소장본도 필사본으로 제목이 한양가로 되어 있다.

한양가는 각 판본에 따라 내용상 약간의 차이가 나타난다. 1880년 간행된 활자본의 콰장 묘사는 문과 장면만 나타나 있지만, 규장각 필사본에는 문과 외에 47행에 이르는 무과 장면이 추가되어 있다. 특히 추가된 부분중에 "신군위의 정병들은 ..... 조선국기를 높이 달고"라는 구절이 보이는데, 이는 친군위의 군사훈련 때 국기가 사용되었음을 알려주는 중요한 기록이다.

한양가의 내용은 크게 13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1) 한양의 지세와 도색으로서의 형국을 노래한 부분, (2) 한양의 궁전과 누각, 보탑을 묘사한 부분, (3) 궁궐의 내시와 무예별감, 내인들이 왕을 시위하는 모습, (4) 승정원과 의정부의 모습, (5) 육조 관아의 모습, (6) 조마거동과 여러 관서의 모습 (7) 선혜청과 여러 관서의 모습, (8) 한양 도성의 각 성문과 시장의 모습, (9) 각종 놀이와 그 놀이가 주로 행해졌던 명승지의 모습 (10) 각종 복식과 기생점고, 가무 모습, (11) 왕의 수원 능행 광격 (12) 문, 무과 시험 광격과 함께, 마지막으로 (13) 한양이 도읍으로서 천하 제일이며, 앞으로 영원할 것이라는 내용의 한양 예찬으로 노래를 끝맺고 있다.

이러한 여러 부분 중에서 가장 압권은 시장 풍경을 묘사한 부분이다. "팔로를 통하였고, 연경일본 다 아는구나 우리나라 소산들도 부끄럽지 안컨마는 타국물산 교합하니 백객전 장할시고"로 부터 시작되는 시전에 대한 묘사는 다른 어떤 자료보다도 가장 구체적이고 생생한 서울 시장의 풍경을 전달하고 있다. 육의전 중에 제일 우두머리였던 선전에서 판매되는 비단만도 30여 종류가 나열고 있고, 이외에 어물전, 백목전, 지전, 청포전, 포전에 서 판매되는 각종 어물과 생선, 무명, 종이, 중국산 모자, 삼베의 종류 등이 모두 나열되고 있다. 또한 종로의 시전만이 아니라 남대문 밖 대표적인 난전거리였던 칠패시장에서 판매되는 생선과 과일류, 그리고 길거리에 노점 형태로 저자를 벌였던 도자전에서 판매되는 수많은 부녀자들의 노리개 종류, 서울 시내 12곳에 설치되어 잡화를 판매했던 목전의 모습 등도 세밀하게 묘사되고 있다. 한양가에서 그려진 시장풍경을 보고 있노라면 마치 서울에 대한 방물지를 보는 듯한 느낌을 갖게 된다.

이 한양가를 통해 우리는 서울이 조선왕조의 수도로서 왕궁과 주요 관서가 위치한 정치, 행정 중심지로서의 위엄과 품격을 갖췄을 뿐 아니라, 일반 서민들이 활기차게 삶을 꾸려 갔던 매우 번성한 상업되시였음을 실감할 수 있다.

흔히 서울 600년을 이해할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1394년 조선 왕조의 서울로 정해진 이래 거의 변화없이 서울의 도시구조가 유지되었고, 이와 같은 중세적 도시 형태가 일제 침략에 의해 근대적인 도시로 변화되었다고 이해하기 쉽다. 그러나 조선시기 우리 역사가 그와 같은 정체적인 모습을 갖지 않았듯이 서울이라는 도시도 600년 동안 많은 변화와 발전을 거듭해 왔다. 서울은 정도 이래 조선사회의 변화 발전을 가장 잘 반영하는 도시였다. 한양가에서 표현된 서울의 풍속과 문물제도는 바로 조선 500년 역사에서 이룩해 낸 변화 발전의 정수라고 봐도 큰 무리가 없을 것이다.

시 장 풍경만이 아니라 다른 부분들도 서울의 고유한 문화와 풍속을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이러한 생생하고 구체적인 묘사는 다른 기록류에서 결코 찾아보기 어렵다. 가람 이병기 선생은 이 한양가를 "유성앙서에 못지 않을 뿐 아니라, 우리 민족의 정신 및 문화적 혈통을 우리에게 명백히 보이고 있는 작품"이라고 평가한 바 있다. 한양가는 19세기 서울의 생생한 모습을 글로 풀어 쓴 풍경화로서, 그 문학적 성취만이 아니라 민속사나 생활사, 상업사 연구에 없어서는 안될 귀중한 문헌이다.

한양가는 송갑용씨가 1880년 목활자본으로 간행된 것을 저본으로 하여, 동상전에 종사했던 상인 조선시대 관직을 역임했던 사람, 목순 행상 그리고 실제 한양가에서 표현되는 서울 거리에 대한 실지 답사 등을 통해 그 내용을 자세히 교주하여 1949년 정음문고로 편찬하면서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 후 1974년에 박성의씨가 송신용의 교주본을 저본으로 하여 순한글고어체 문장을 현재 우리가 쓰는 글투로 바꿔 민중서관에서 출판하였다. 지금 규장각에서 병풍으로 제작하여 전시한 한양가는 바로 박성의씨가 교주한 것을 바탕으로 삼아 제작한 것이다. 이번 영인본은 위 규장각전시용 병풍과 규장각 소장 한양가 두 종류를 실었다.

La Ballade de Hanyang, ode[1] en alphabet coréen chantant le Séoul du premier 19e siècle, le système de sa culture matérielle et sa civilisation des mœurs, a été composée [dans les années] 1840 par Hansan’gǒsa[2]. Sur l’auteur, Hansan’gǒsa, aucune information. Toutefois Song Sinyong[3], premier annotateur du texte en 1949, sur la base de ce qu’un de ses passages fait un éloge aussi documenté qu’insolite du Bureau des Serviteurs royaux[4] supposa qu’il s’agissait soit d’une des personnalités à l’origine des Cantilènes de notre temps et autres ouvrages du même registre[5], soit de quelqu’un de sa descendance.

Plusieurs versions imprimées nous en ont été transmises. Associant à la Ballade composée par Hansan’gǒsa au printemps du nouvel an de Kapchin (mars 1844[6]) un Nouveau recueil augmenté des contines[7] et un Hymne de Kapsu[8] composé pour célébrer la naissance de Sunjong en l’an 10 de Kojong (1874), la nouvelle édition typographique de « Sǒktong »[9] datée de 1880 est la plus représentative. Plusieurs copies manuscrites nous sont aussi parvenues. L’une d’entre elles est mentionnée au Grand recueil des musiques royales[10] comme « Chanson des gens et des choses de Hanyang »[11] ; une autre est mentionnée aux Chansons contre la vieillesse et l’angoisse[12] – en possession de Karam Yi Pyǒnggi[13]– comme « Chanson de la Hanyang céleste »[14]. Seule la copie manuscrite, propriété de la Bibliothèque royale Kyujanggak, se présente sous le titre de Hanyangga.

Selon telle ou telle version du texte, de légères variantes apparaissent au plan du contenu. C’est ainsi uniquement dans l’édition typographique de 1880 que figure la scène du Grand concours munkwa (promotions du Dragon) qui décrit l’Aire aux examens[15] quand la copie manuscrite de Kyujanggak, elle, y ajoute encore un descriptif du Concours militaire mukwa (promotions du Tigre) de pas moins de quarante-sept vers. Mais comme il y parait justement un passage qui rapporte que

« les escadrons / de lanciers du roi […] /

/ brandissent haut / de Chosǒn le drapeau »,

cet appendice s’offre comme une source capitale qui renseigne sur l’utilisation des drapeaux lors des manœuvres militaires du ch’in’gunwi[16].

Le contenu du Hanyangga peut être subdivisé grosso modo en 13 parties. 1) partie qui, de situation cosmique[17] en forme urbaine[18], chante la morphologie[19] de Hanyang, 2) partie qui décrit les salles d’audience, pavillons de réception et pagodes de Hanyang[20], 3) portrait des eunuques du palais, gardes en armes et domestiques au service du roi, 4) tableau du Conseil privé et du Grand Conseil d’Etat[21], 5) tableau des Six Ministères, 7) tableau de l’Intendance des Grains[22] et de quelques autres administrations, 8) tableau de chacune des portes de l’enceinte fortifiée de Hanyang et de chacun de ses marchés, 9) tableau de toutes sortes de distractions[23] et surtout des hauts-lieux[24] de leur pratique, 10) tableau d’accoutrements en tous genres, de boutiques pour kisaeng et du monde du spectacle, 11) scène de la nécropole royale de Suwǒn, et enfin, groupée avec 12) scènes des concours littéraires et militaires, 13) chant de clôture en forme de panégyrique posant Hanyang comme la plus belle ville du monde promise à une éternité d’avenir.

Dans cette fresque en plusieurs tableaux, le moment le plus remarquable est la description du paysage des marchés.

 

« A perte de rues / cent boutiques à vanter /

/ entassant négociant / d’exotiques produits /

/ bien connus au Japon, d’une cité louangée /

/ et de quoi pavoiser, des fabriques de Corée » .

Dès l’ouverture du descriptif consacré aux Magasins urbains[25], la Ballade de Hanyang, mieux qu’une autre source de ce type, offre un paysage tout-à-fait concret et vivant des marchés de Séoul. Ainsi, au Magasin des Soieries qui était le principal des Six Magasins centraux[26], énumère-t-elle rien moins qu’une trentaine de variétés de soie. Voire, au Magasin des poissons, au Magasin des feuilles, au Magasin des cotons, au Magasin des lins, au Magasin des laines tout est-il sujet à énumération de poissons vifs ou frais, de cotonnades, de papiers, de chapeaux fabriqués en Chine et de diverses étoffes. Et quand ce ne seraient plus les Magasins centraux de Chongno, ce sont, dans les rues typiques du « marché libre[27] » hors-les-murs au-delà de Namdaemun, les espèces de poisson et les variétés de primeurs vendues au Marché de Ch’ilp’ae ; encore une autre rue et ce sont, au Marché des lames[28] où les accessoires s’exposent en forme d’étalage, les très nombreux styles de norigae pour dames ; c’est enfin, établis en douze lieux intra-muros de Séoul, le tableau du Marché des tablettes[29] où se vendait tout le bazar qui se trouvent, tous, minutieusement décrits. A voir ainsi brossé le paysage de la marchandise, on tire la sensation d’avoir comme directement sous les yeux le Catalogue général des ventes[30]  de Séoul.

Grâce à la Ballade de Hanyang, nous est donc offert de Séoul mieux que son être de capitale dynastique du Chosǒn, mieux que la majesté et la dignité d’un centre administratif et politique accueillant palais et ministères : la possibilité même de saisir sensiblement son être de métropole commerciale en plein essor, où les gens ordinaires du peuple[31] menaient des vies vibrantes d’animation.

 Trop souvent, dans leur appréhension des six-cents ans [d’histoire] de Séoul, la plupart des gens se laissent aisément aller à penser qu’une fois instituée capitale de la dynastie Chosǒn en 1394, la structure urbaine de Séoul se serait maintenue sans presque aucun changement et que sa forme de cité, dès lors médiévale, se serait métamorphosée en métropole moderne du seul fait de l’invasion impérialiste du Japon. Pourtant, tout comme la période Chosǒn n’a pas revêtu qu’une seule forme historique, l’histoire de cette ville nommée Séoul a-t-elle été, six cents ans durant, changement et expansion continus. Séoul après fondation est même la ville qui reflète le mieux la trajectoire historique de la société de Chosǒn. Hélas, il n’y a pas grand monde pour voir que la civilisation morale et la culture matérielle de Séoul telles qu’elles s’expriment dans la Ballade de Hanyang ont justement, au terme de cinq siècles d’histoire de la dynastie, constitué un apex de cette trajectoire.

Il ne s’agit pas simplement des paysages de la ville marchande : le texte prend aussi une grande valeur de ce que d’autres de ses passages offrent une image vivante des pratiques culturelles et des coutumes propres à Séoul. Il est difficile voire impossible d’en trouver des descriptions aussi vivantes et concrètes dans les autres types de source. D’où que Maître Karam Yi Pyǒnggi formula ce commentaire sur le Hanyangga : « loin de se réduire à quelque sorte de film avec voix[32], il s’agit d’une œuvre où se manifeste de façon évidente à nos yeux l’esprit national et le lignage de la civilisation coréenne ». Tableau de mœurs (ou Tableau de pensée)[33] qui déploie en écriture la forme vivante du Séoul du 19e siècle, la Ballade de Hanyang est donc bien davantage qu’une parfaite réussite littéraire : une source de tout premier plan, indispensable à des recherches en histoire du folklore, en histoire du quotidien ou en histoire du commerce.

Ayant pris pour texte de référence du Hanyangga l’édition xylo-typographique de 1880, Song Sinyong en a très précisément annoté le contenu par exemple [en cherchant des informations] sur les marchands qui s’affairaient au Marché des tablettes de l’Est ou sur ceux qui, à l’époque Chosǒn, occupaient une charge publique, ou sur les charpentiers et les marchands itinérants[34] tels qu’ils apparaissent ensuite de façon si réaliste dans le Hanyangga, [recherches qu’il prolongeait] ensuite in situ par une enquête de terrain dans ces rues de Séoul dont le Hanyangga nous laisse une image si réaliste [35]; et l’ayant publié chez l’éditeur Chǒngǔm mun’go, il entreprit alors de le faire connaître plus largement. Après quoi, en 1974, c’est Pak Sǒngǔi qui l’a réédité chez Minjung sǒgwan en substituant à la composition en pur han’gǔl de police désuète une présentation typographique qui nous soit plus familière. Le Hanyangga tel qu’il est aujourd’hui exposé à la Bibliothèque Kyujanggak sous forme de paravent est une œuvre réalisée sur la base de ce travail d’édition de Pak Sǒnghui. La reproduction du texte que vous avez désormais en mains procède du collationnement de la version en paravent exposée à Kyujanggak et du Hanyangga manuscrit qu’elle tient dans ses collections.

 

[1] kasa 가사 歌辭

[2] 한산거사  漢山居士

[3] 宋申用 : ?

[4] aekcheongsǒ 액정서 掖庭署. RHAC 163

NB : la dénomination française des organes administratifs est empruntée au Répertoire Historique de l’administration coréenne [RHAC suivi d'un numéro de notice] de Maurice Courant[1891].

[5] sosep’ungyo  소대풍요 昭代風謠 p’ungyosoksǒn 풍요속선 風謠續選p’ungyosamsǒn 풍요삼선 風謠三選

[6] Double erreur dans le texte, sur la lecture du second caractère de la date et sur la transposition de la date elle-même. Je corrige.

[7] Sinjǔngtongyo 신증동요 新增童謠

[8] Kapsugyǒngga 갑수경가 甲戍慶歌

[9] 石洞新刊 : ???

[10] Aakpugajip 아악부가집 雅樂部歌集

[11] Hanyang p’ungmulka 한양풍물가漢陽風物歌

[12] Kangnobulsuga 각로불수가 却老不愁歌

[13] 李秉岐 (1891 ?-1968), homme de lettres, poète, critique, lexicographe, éditeur.

[14] Hanyang t’aep’yǒngga한양태평가漢陽太平歌

[15] kwajang 과장 科場

[16] 친군위 親軍衛 RHAC 960

[17] chise 지세 地勢

[18] toǔp 도읍 都邑

[19] hyǒngguk 형국 形局

[20] Respectivement kungjǒn 궁전 宮殿chǒnggak 亭閣pot’ap 寶榻

[21] Respectivement sǔngjǒngwǒn 승정원 承政院 et ǔijǒngbu  의정부 議政府RHAC 309 et 300

[22] Sǒnhyech’ǒng 宣惠廳 RHAC 376

[23] nori 놀이

[24] myǒngsǔngji 명승지 名勝地

[25] sijǒn 시전 市廛

[26] Yugǔijǒn 육의전  六矣廛 : c’est-à-dire les six magasins à monopole corporatif

[27] nanjǒn 난전 亂廛 : autant dire, dans ce contexte, le « marché illégal ».

[28] tojajǒn 도자전 刀子廛

[29] sangjǒn 상전 床廛

[30] pangmulchi 방물지 方物志

[31] Ilban sǒmin 일반 서민 一班 庶民

[32] ??? Mot manquant ?

[33] Respectivement p’unggyǒnghwa 풍경화 風景畵et haeǒhwa.해어화 解語畵. Ce second terme, non lexicalisé, porte un jeu de mot intraduisible à plusieurs ressorts sur un bien attesté 해어화 解語花 de même prononciation tiré du monde des kisaeng : « fleur qui sait lire le langage [du cœur] »…. Mon essai de traduction renvoie davantage à Max Weber et à sa métaphore fameuse du « Tableau de pensée » (Gedanken Bild) pour expliquer ce qu’est un Ideal-Type… de ville médiévale européenne par exemple.

[34] Respectivement moksu 목수 木手et haengsang 행상 行商

[35]  Structure de la phrase qui me « dépasse ». Mots manquants ?

 
 

Autour du texte:

Remarques liminaires

 

– La préface n’est pas signée. L’éditeur Minch’angsa a une adresse (Kwanak-ku, Sillim 2 dong) qui le situe sur le campus de l’UNS, soit à proximité de Kyujangak. Il publie par ailleurs les revues 조선시대사학보 et 한국실학연구. Cette édition du Hannyangga m’a été donnée lors d’une des manifestations liées aux Célébrations du 600e anniversaire de la fondation de Séoul.

 

– Souligné : mes interventions dans le texte (mots ajoutés, erreurs manifestes corrigées)

– En jaune : partis pris ou essais de traduction (titres d’ouvrages, nom de fonctions, formes fixes, etc)

– En bleu : difficulté relevant d’une érudition insuffisante ou d’une documentation impuissante

– En vert : difficulté de compréhension du texte (grammaire, syntaxe ou coquilles et lacunes)

Academy of Korean studies Inalco Université Paris Diderot-Paris 7 EHE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