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xte original : 1-5. 조선왕조 성립을 어떻게 볼 것인가 (논쟁으로 읽는 한국사)

정체에서 발전으로

 

1392년 조선의 성립을 단순히 고려왕조가 새 왕조로 교체된 사건으로 축소시 켜 이해할 수는 없다. 지배집단 내부 권력투쟁의 결과라는 정치사적 기록의 배후에는 고려 후기에 격화된 사회적 갈등과 경제구조의 모순을 극복하여 새로운 이상사회를 구현하려는 사대부의 사회세력화와 견고한 이념지향이 작용하고 있었다.

 

조선왕조 성립에 관한 평가는 일제강점기 이래 여러 측면에서 시도되어 왔다. 이성계李成桂 일파가 사대주의를 지향한 결과 조선이라는 왕조가 성립되었 다는 식민사관부터, 여말선초의 정치 - 경제 - 사회 문화 각 분야의 내재적 변동의 결과 역사적 전환이 일어났다는 발전사관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이런 연구결 과의 차이는 이 시기의 변화에 대한 사료해석상의 차이와 사대부라는 변동주체 가 지향한 이념의 성격에 대한 이해의 차이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역사상과 역사인식의 차이가 작용하고 있다.

 

근대적 방법에 의한 한국사 연구가 일제강점기 일본인 학자들에 의해 시작되었듯이 조선왕조에 대한 근대적 연구도 일본인에 의해 본격화되었다. 그런데 일본인의 조선시대 연구는 한국사를 부정적으로 파악하여 한국지배를 합리화 하려는 식민사관 속에서 진행된 것이었다. 그들이 조선왕조를 이씨 왕조 라고 폄하하는 데서 드러나듯 고려에서 조선으로의 왕조교체는 왕씨의 고려에서 이씨의 조선으로 이어지는 단순한 왕조의 교대일 뿐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 과정의 역사적 발전을 증명할 인식 틀이나 사료발굴 의지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당연히 그들은 한국사의 중요한 특성의 하나로 사대주의를 지적했고 그 특성은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에서 비롯되어 마침내 건국이념에까지 뿌리내 린 것으로 보았다. 다시 말하면 조선 건국은 원 명이 교체되는 동양의 정세변화 에 힘입은 것으로서 친명 사대파가 친원 사대파를 대신하여 정권을 탈취한 사건에 불과하다는 것이었다. 이런 관점을 통해 강조하고자 했던 것은 한국사회 의 정체성이었고 그것이야말로 일본의 한국지배를 합리화하는 강력한 이데올로기였다. 그러나 이런 관점으로는 조선왕조 건국기의 내재적인 사회경제적 변화를 정당하게 읽어낼 수 없었다.

 

이에 반해 일제강점기 한국인 연구자들은 조선 건국을 둘러싼 정치 사상 경제 의 변화를 분석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이들 연구는 조선 건국의 근본적 계기를 신세력과 구세력 간의 경제적 이해관계 갈등이라는 민족 내부의 사회경 제적 발전 과정에서 찾았다. 신구 세력의 갈등이 정치적으로 표면화된 것은 전제개혁田制改革운동에서였는데 고려 말의 정치적 사상적 갈등은 기본적으로 이 문제를 둘러싼 이해의 대립에서 촉발되었다고 본다 이때 전제개혁운동은 이성계를 비롯한 신진 관리와 휘하 군사들의 녹봉과 군량미를 충족시키기 위해 전개된 것으로서 사회혁명 또는 사회정책적인 것으로 이해하기보다는 재정정책 차원으로 이해해야 한다. 또 사상사 연구에서 불교를 대신해 성리학이 지배이념으로 등장하는 사실에 주목하여 그 의미를 사원경제와 승려집단의 말폐를 시정하려는 경제적 동기 곧 국가재정의 문제와 관련시켜 설명했다. 그러므로 유학자들 가운데 적극적 배불론자와 소극적 배불론자가 병존했던 이유를 유교에 대한 학문적 조예의 차이가 아니라 개혁에 대한 열의의 차이로 해석한다.

 

조선왕조의 성립을 본격적으로 주체적 발전적인 관점에서 인식하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로서 이때 비로소 고려에서 조선으로의 전환이 정치 사상의 측면뿐 아니라 사회와 경제의 측면에서도 다차원적으로 분석되고 그 역사적 의의를 조명받기에 이르렀다. 신흥사대부라는 정치세력의 발견을 통해 역사발 전을 주도하는 새로운 계층의 성장을 확인할 수 있었고 양반과 중인 연구로 신분변화양상을 검토함으로써 지배층의 폭이 확대되고 있음을 실증적으로 밝혀냈다. 그리고 사회변화와 변동을 수렴하여 새로운 사회를 전망하는 사상사 연구 토지제도와 토지소유관계 분석을 통해 농민층의 사회경제적 성장을 밝혀내는 연구 등은 조선왕조의 성립에 따른 발전적 역사상을 제시한 것이었다 물론 논자에 따라 그 변화의 내용이나 성격에 대한 평가에서 차이가 드러나고 있지만 조선왕조의 성립을 단순한 왕조교체가 아니라 한국사의 계기적 역사발 전 과정의 일환으로 파악하는 데는 동의하고 있다.

고려 말에서 조선 초에 이르는 시기는 정치는 물론 경제 사회 문화 전분야가 변화의 기운으로 충만했다. 신흥세력으로 성장한 사대부들은 현실의 변화 변동 을 수렴하면서 농민의 의견도 반영하여 제도개혁을 추진했다.

 

여말선초에 해당되는 14,15 세기를 사회발전기로 이해하는 연구로서 가장 먼저 행해진 것은 발전을 주도한 신흥사대부라는 정치세력의 정체를 확인하는 작업이었다. 신흥사대부는 무인집권기 이래 신분적으로는 향리에 기반을 두고 경제적으로는 중소지주의 기반을 가지고 있었는데 과거나 군공軍功 등 주로 후천적 능력을 통해 성장한 정치세력이었다 이들은 당시로서는 선진적인 정치사상이었던 성리학을 바탕으로 사회의 변화 발전에 대응하는 개혁정치를 추구했다. 최근에는 신흥사대부라는 정치세력의 실존 여부에 대한 근본적인 이의제기와그범주의다기성에대한문제제기가있었고사대부의연원을 공민왕 대로 봐야 한다는 부분적인 논의가 있었다. 하지만 이 시기에 변화를 주도한 정치세력이 신흥사대부라는 사실은 역사의 계기적 발전이라는 시각에 서 보았을 때 의문의 여지가 없다.

 

조선왕조의 성립에 대한 발전적 인식은 신흥사대부라는 정치주도세력의 확인결과를 토대로 고려 후기 사회경제체제의 변동과 조선왕조의 성립을 통해 달라진 변화의 내용을 살펴보는 데 집중되었다 한국사의 역사상과 관련하 여 대표적인 연구경향을 살펴보면 다음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첫 번째는 조선 건국을 통해 나타난 여러 양상들에 주목하여 조선의 성립은 고려와 질적으로 다른 새로운 사회의 성립을 의미한다고 보았던 경향이다 이 연구는 건국의 핵심이론가인 정도전의 사상분석을 통해 왕조의 통치이념을 명확히 하고 농민의 처지와 밀접한 신분 토지 문제를 궁구하여 변화된 양상들 을 밝혀냈다 특히 신분변화에 주목하여 양천제良賤制설을 제기했다. 이에 의하면 조선왕조는 향리나 백성층에서 성장한 사대부와 광범한 하층농민군사의 지지와 참여로 형성된 민본국가로서 사대부나 한량閑良과 아울러 하층민의 이익을 조정하면서 양자를 동질화하는 정책을 추진했다 따라서 조선 초기의 신분구성 은 양良신분과 천賤신분으로 이루어졌고 천인을 제외한 양인들은 능력만 있으면 누구나 관리가 될 수 있었다. 양인에는 백성이나 공상인工商人 간척지도干尺之徒 와 같은 신량역천身良役賤 그리고 향리가 포함되는데 이들은 법제적으로 권리와 의무에 차등이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자유민이며 세습신분이 아닌 성취신분이 었다 그런 점에서 세습신분이며 비자유민인 천인과 엄격히 구별되었다고 한다.

 

이 연구의 특징은 양반 특권 세습신분설을 비판하는 데 있다 양반은 조선 후기처럼 지배신분층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문무관료집단을 총칭하는 대명 사로서 교육 입사 군역 등의 특혜가 주어지지 않았다. 또 성중관成衆官과 같은 서리는 유품조사流品朝士 생원 진사 등의 사류士類들과 동등한 위치였다 즉 조선 초기는 양반이 지배계층으로서 사회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양인계 층이 다 같이 참여하는 개방된 사회였다는 것이다.

 

이런 신분적 개방성을 뒷받침하는 것이 부국강병이념과 중앙집권론이라고 한다 정도전의 사상 연구에서 드러나듯이 조선왕조는 중앙집권적 정치체제를 지향하면서 공적 영역을 확대하여 공권력을 강화하고자 했다. 즉 국가주의이념 이 담긴 주례周禮를 통해 농업을 비롯한 상업 수공업 수산업 등 모든 산업에 공개념을 도입하여 권세가의 사유와 사영을 축소시키고 공익  우선주의를 내세웠다 특히 산업에서 근본이 되는 것이 토지이므로 토지에 공개념을 도입하 여 국전제國田制를 실현하고자 했는데 차경借耕제도를 없애고 계민수전計民授田의 실현을 목표로 자영농을 창출하려는 데 목적이 있었다 이는 곧 양인확대정책이 나 관장官匠 관상官商제 공교육제 확립 공적 인재등용제도의 정비 등과 서로 표리관계를 이루는 것으로서 그 이전 시기와 달리 사적 지배를 배제함으로써 토호 향리의 중간수탈을 금지시키고 양인의 공공이익을 증진시키려는 사회정 책적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했다 요컨대 조선의 성립은 단순한 왕조교체 가 아니라 시대를 달리하는 새로운 사회로의 획기적 전환을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다.

 

조선왕조 성립을 바라보는 두 번째 견해는 14-15세기의 연속성을 전제로 농업생산력 발전과 그 바탕 위에서 전개되는 여러 사회변동을 파악하는 연구이 다이는신흥사대부의성장배경을사회경제적변동에서찾고 그 변화변동을 성리학이 제시하는 정치사회이념을 통해 수렴되는 것으로 이해한다.

 

이 연구에 의하면  14-15세기에는 시비법施肥法과 수차水車 천방川防의 수리시 설 발달 등 농업기술의 개선으로 휴한법休閑法이 극복되고 조방농업에서 연작상 경連作常耕의 집약농업으로 바뀌게 되는데 이는 중국 강남농법의 영향 곧 성리학의 영향으로서 이를 주도한 것이 신흥사대부였다고 한다. 신흥사대부는 부재대지주不在大地主였던 문벌귀족과 달리 지방의 중소지주라는 출신 조건에서 농업 문제에 훨씬 깊은 관심을 가지고 성리학을 수용함으로써 새로운 역사의 주도층으로 자리잡게 되었다는 것이다.

 

한편 농업생산력의 발전은 향촌사회관계에도 변화를 주어 종래 향도香徒 중심의 지역촌이 붕괴되면서 자연촌 단위인 리里의 성장이 두드러졌다. 향촌사 회 사회구성 조건의 변화에 대해 훈신 척신 계열이 관권官權을 매개로 중앙집권 화를 통해 대응했다면 품관 중심의 사림파는 각 지방단위의 사회에 자치적 기능을 부여하면서 성리학의 사회제도인 사창제社倉制 향약鄕約 등을 통해 대응했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14-15세기의 성리학을 이끈 주도세력인 신흥사족과 사림파를 같은 계통으로 파악하는 점이다. 즉 사림파의 연원을 조선 건국에 반대했던 정몽주鄭夢周 길재吉再 등 이른바 절의론자節義論者에서 찾는데 이런 관점에서는 조선왕조의 건국 주도세력에게 역사적 의미를 크게 부여하기 어렵다 결국 이 연구는 조선의 성립을 일정하게 평가하면서도 14-15세기를 연속적 발전 과정으로 이해하는 데 특징이 있다.

세 번째는 조선왕조가 귀족관료에서 사대부관료로의 지배층교체와 그에 조응하는 정치체제의 합리적 재편성에 따라 성립되었다는 연구경향이다 연구자마다 혹은 연구주제에 따라 내용파악이 다른 점이 있지만 조선과 고려를 동질의 사회로 파악하는 점에서는 일치한다.

이 연구는 첫 번째의 양천제설과 달리 조선 초기의 신분 계층구조를 지배신분 과 피지배신분으로 양분하고 양반을 상급 지배신분 중인 기술관 향리 서리 을 하급 지배신분 양인과 노비를 피지배신분으로 보면서 각 신분의 세습성이 강하다고 본다. 즉 양인은 법제상으로 과거에 응시할 수 있었지만 경제적 능력이나 교육환경을 볼 때 과거합격이 거의 불가능했고 향리나 기술관 같은 중인은 양반과 구별되었으며 또 상민과도 차이가 있었다고 한다.

 

이런 관점은 경제의 핵심인 농업 곧 토지 문제를 설명하는 방식에도 적용되었다. 논자에 따라 다양한 견해가 있지만 대체로 전제개혁운동의 귀결인 과전법에는  1/10의 조세공정이나 농민보호규정 그리고 경기사전京畿私田의 원칙 등이 제시되었는데 이는 종래의 토지제도보다 더 진전된 것으로 평가된다 토지소유  관계에 대해서 과전법은 토지국유의 원칙을 표방하면서 사적소유권이라는 현실을 반영한 것으로 이해된다 과전법을 비롯한 일련의 전제개혁운동에서 구 귀족의 토지가 몰수되고 많은 자작농이 창출된 것은 사실이지만 병작제가 보편화됨에 따라 양인 자작농은 양반 농장의 소작인으로 전락하거나 양반의 노비가 되어 양반과 양인의 빈부차가 커진 것으로 보고 있다.

 

또 다른 연구는 과전법이 전주전객제와 지주전호제라는 중세 경제체제의 두 가지 틀 속에서 수조권收租權이 강화 팽창하는 것을 저지함으로써 소유권이 안정 성장할 수 있도록 보장했고 국왕 국가는 사대부 양반에게 과전을 분급한 대가로 충성스러운 직역봉공職役奉供을 요구했다고 한다. 이런 연구는 과전법을 비롯한 일련의 전제개혁운동이 사대부의 이해관계를 반영한 제한적인 의미를 가지며 결국 중세사회의 경제제도를 새롭게 재편성하는 근거가 되는 것으로 이해한다.

 

또한 조선왕조 성립의 정치이념에는 송의 성리학이 크게 반영된 것으로 본다 지배이념이 고려의 불교 유교 병존에서 조선의 유교로 대치되어 성리학시 대를 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최근의 연구에서는 여말의 사대부가 성리학의 정치사상을 기초로 고려의 정치체제를 변혁하여 지배질서를 재편하려 했다고 보고 있다. 그 과정에서 농민의 요구를 수렴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중소지주의 입장에서였다는 것이다. 여기서 성리학은 신분제와 지주전호제를 옹호하는 사상체계라는 사실이 전제되어 있고 때문에 조선왕조는 성리학적 지배질서를 지향하여 탄생한 봉건국가라고 이해하는 입장이다. 이 연구는 앞의 두 가지 경향과 달리 조선의 성립을 봉건적 지배질서의 재조정 혹은 중세사회 내부의 발전 과정으로 파악하고 있다.

이상의 세 가지 관점은 조선왕조 성립에 대한 주체적 발전적인 연구경향의 일단을 보여주는데 여기에는 상이한 역사인식과 역사상이 내포되어 있다 우선 조선의 성립을 사회정책적 차원에서 파악한 연구에서는 왕조의 성립이 근세사회의 성립을 의미한다고 이해한다. 민생과 직접 관련된 토지와 신분에 대한 개혁을 지향했고 결국 공적 권력과 공적 질서를 최우선하는 중앙집권의 공공국가로서 면모를 높였다고 보는 것이다. 이런 평가는 백성의 지지에 의한 왕조의 성패와 권력변동을 통한 발전 가능성 그리고 중앙집권국가의 공공성을 긍정적으로 보는 역사인식에 바탕한 것이다.

 

이 연구는 1960년대 이후 긍정적이고 발전적인 시각이 극대화된 연구경향을 보여주지만 발전적 측면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그것이 가지는 시대적 한계를 등한시했다. 신분제 연구에서는 능력 중심의 개방된 사회를 강조함으로써 조선 초기의 신분제사회가 갖는 특성을 도외시했고 사상사 연구에서는 개인 사상의 이상적 측면을 실제 현실과 동일시한다는 인상을 주었다 개혁사상이 갖는 역사성과 그 사상 형성의 시대적 배경을 깊이 있게 고려하지 않으면서 독자적이고 발전적인 면만 부각시켰다 역사연구에는 주체적이고 발전적인 연구시각이 필요하지만 그렇지 못한 면을 함께 밝혀내는 것도 필요하다.

 

한편 14-15 세기의 연속성을 중시하면서 조선사회의 발전 과정을 밝혀내는 연구경향은 사회구성의 기본토대인 농업 예컨대 생산력과 생산 제관계 지배세 력인 신흥사대부 그리고 성리학의 역사적 기능에 초점을 맞추었다. 이 연구는 16세기 사림파의 연원을 정몽주와 같은 고려 말의 절의론자에게서 찾고 조선왕조의 지배사상인 성리학의 당시 사회적 순기능을 발견하고자 했다 여기에는 사림파와 성리학에 대한 긍정적 인식이 전제되어 있고 500년 조선왕조의 존립근거 존립의의를 찾아보려는 의도가 담겨 있다.

 

이 연구는 사림파와 그 사상인 성리학이 당시 상황에서 가졌던 긍정적 측면을 부각시켰다. 단 사림파를 중심축으로 사림파의 주관적 이해를 그대로 사실로 인정하면서 훈구파를 비판적으로 바라봄으로써 사림파의 역사성 곧 지배층으로서의 계층적 성격을 등한시했고 사림파의 연원을 고려 말 절의론자 와 연결시킴으로써 정도전 등 건국주도 사대부들의 개혁성향을 약화시키는 연구결과를 보여주었다. 이런 관점은 앞의 연구경향과 같이 조선 양반사회가 갖는 긍정적 측면과 500년 조선왕조의 역사적 의의를 크게 부여한다는 데 공통점이 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견해는 보편적 역사발전론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조선의 성립을 중세사회의 합리적 재편성 과정 혹은 중세사회 내부의 발전 과정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이는 식민사관에서 말하는 정체성론을 비판할 뿐만 아니라 논자에 따라서 근대화론을 전제하기도 하고 사회구성체적 시각이 전제되기도 한다. 특히 후자의 경우 한국사의 발전 과정을 세계사의 보편적 발전 과정에 입각해서 체계화하려고 한다. 조선왕조의 성립 과정으로 생산력 발전과 이에 기초한 농민층의 성장 그리고 제도개혁으로 이어지는 사회발전이 제시되는데 그 지향하는 바는 지주의 농민지배를 옹호하는 봉건적 사유인 주자학을 기초로 확립된 봉건적 지배체제 봉건국가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조선왕조를 양반 사대부를중심으로한봉건국가의재편성집권체제의단계적강화과정의 산물이라고 보는 것이다.

 

조선왕조 성립에 관한 역사적 평가는 한국사 상像에 대한 견해차이를 내포하 고 있고 또한 시대구분론과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작게는 중앙집권과 지방자치 계층과 계급 지식계층과 기층백성의 역할 문제 등과 관련되어 있고 크게는 조선의 성립을 근세사회의 성립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중세사회 내부의 발전으로 볼 것인가 하는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

 

조선왕조의 성립을 정체적 시각에서 바라보는 것도 문제이지만  지나치게 발전의 시각에서 바라보는 것도 올바른 역사상을 확립하는 데 방해가 될 수 있다 왜냐하면 역사 연구에서는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사실검증이 최우선적 으로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Academy of Korean studies Inalco Université Paris Diderot-Paris 7 EHE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