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elier de traduction : 만인보

Texte original:

작자의 말

시의 생활 30년이 돼 간다. 이 땅의 말로 시를 쓰는 일은 다른 나라의 그것보다 더 절실성이 요구된다는 것을 깨칠 만한 세월이기도 하다. 암울의 세월이기도 하다. 언젠가 나는 이 땅의 말로 시를 쓰는 것을 질곡이라고 생각한 적도 있다. 그것이 현실의 질곡과 시의 질곡이 하나라는 사실로 인식됨으로써 나는 시가 역사의 산물임을 터득한 것이다. 30년은 이 땅의 많은 사람들에게 헛되지 않을 세월이다. 초라하기 짝이 없는 나에게도.

그동안 내 시를 시라고 용인해 준 이 땅의 독자 여러분에게 조책감과 더불어 깊이 감사해 마지 않는다. 이 일 많은 땅에서 태어난 까닭으로 나 같은 사람도 한 시인으로 일하도록 받아들여준 은혜 또한 크다. 이런 사실을 성찰할 때 나는 다시 한 번 세상의 시인이 될 의무로 새로와 진다.

그러므로 이 땅의 말을 함부로 썼구나 하는 뼈ㅏ픈 회고도 회고려니와 이와 함께 내가 아프올 써야 할 말이 두려운 바 있다< 바로 이 두려움으로부터 나는 거듭나야 할 운명을 본다. 생각컨대 이 땅의 삼천리 강산 위에 내가 살고 있음이 엄연하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시인으로 사는 일을 다할 터이다. 시가 죽으면 진실이 죽는다. 노예로부터도 모험으로부터도 시를 살려내지 않으면 안된다. 능히 역사의 이름으로 그래야겠다.

나의 20대부터 50대에 이르는 동안 내 시의 행로 또한 다단한 바 있었다. 나는 방랑의 시대를 살았다. 그것은 동족상잔의 내전으로 인한 폐허를 떠도는 자의 역사에 대한 무책임을 자유로 착각한 전후 세대의 삶이었다. 허무가 내 청춘의 권리였다. 나는 6. 25로 산에 들어 갔고, 4. 19로 산에서 내려왔다.

역사는 이런 나의 삶에 각성을 요구했다. 그 요구를 발견했을 때의 나의 감격은 아직가지도 선명하다. 70년대로부터.

더러 시련이랄 것도 없는 시련을 겪은 셈이기도 하지만 그것이 어디나 혼자 겪는 것도 아닌 바에는 도리어 그 시련 가운데 내 시의 원천이 있음을 알게 된 기쁨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내가 서사시 "백두산"을 비롯한 다른 계획들과 함께 꿈꾼 것이 이 "만인보"이다. 80년대 백두 남한산성 아래에서 살 때 이 계획이 떠올랐다가 이제야 그 꿈이 실현됙 시작한다. (나는 이제 서구시의 외세로부터 해방된 것이다. 이 말 한마디에 내 긍지의 전부가 들어 있다.

지 전작시편 "만인보"는 막말로 말해 내가 이 세상에 와서 알게 된 사람들에 대한 노래의 집결이다. 나의 만남은 전혀 개인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공적인 것이다. 이 공공성이야말로 개인적인 망각과 바임으로 사라질 수 없는 것이며, 그것은 삶 자체로서의 진실의 기념으로 그 일회성을 막아야 한다. 하잘 것 없는 만남 하나에도 거기에는 역사의 불가결성이 있다. 

이 같은 원칙이 나에게 길들여진 바 사람들의 서사적인 숭엄성으로 되고 거기에서 이 시편이 나온 것이다. 여기세는 사람의 추악까지도 해당되어야 했다. 소위 진선미만으로는 사람을 다 밝힐 수 있는 때는 사실인즉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 그것은 위선에만 있기 때문이다.

우선 내 어린 시절의 기초환경으로부터 나아간다. 그것은 다음 단계인 편력시대의 여려 지역과 사회 각계 그리고 이 땅의 광막한 역사와 산야에 잠겨 있는 세상의 삶을 사람 하나하나를 통해 현재화할 터이다.

이는 결국 가서 민족의 동시적 형상화가 들어 있어 마땅하다. 따라서 민족 생명력의 전형화 역시 덤으로 기대하고 있다.

그러니까 이 작업의 계속은 나의 사람에 대한 끝없는 시적 탐구이자 이름없는 역사행위이고자 한다. 시인이 역사의 곤능 없이는 살 수 없느 연유이겠다.

한마디로 덧부틴다면 서사시 "백두산"은 사람을 총체화하는 것인 반명 "만인보"는 민족을 객체의 생명성으로부터 귀납하는 수작이라고 해야겠다.

지난 20년 동안 이 땅의 문학과 민족현실의 엄정한 진로를 개척해 온 창작과 비평사가 죽었다가 살아나 그 이름 두 자만이 남겨진 채 다시 일을 하기 시작하는 이토록 감회 깊은 판에 이 책이 나오게 된 점을 나는 마음 속에 아로새기고 있다. 우리는 넓다. 우리는 그 무엇보다 길다.

 

1980년대 복판을 지나며

고은

 

 

 

 

Traduction(s)

Maninbo

Texte original

Traduction

작자의 말

 

시의 생활 30년이 돼 간다. 이 땅의 말로 시를 쓰는 일은 다른 나라의 그것보다 더 절실성이 요구된다는 것을 깨칠 만한 세월이기도 하다. 암울의 세월이기도 하다. 언젠가 나는 이 땅의 말로 시를 쓰는 것을 질곡이라고 생각한 적도 있다. 그것이 현실의 질곡과 시의 질곡이 하나라는 사실로 인식됨으로써 나는 시가 역사의 산물임을 터득한 것이다. 30년은 이 땅의 많은 사람들에게 헛되지 않을 세월이다. 초라하기 짝이 없는 나에게도.

그동안 내 시를 시라고 용인해 준 이 땅의 독자 여러분에게 조책감과 더불어 깊이 감사해 마지 않는다. 이 일 많은 땅에서 태어난 까닭으로 나 같은 사람도 한 시인으로 일하도록 받아들여준 은혜 또한 크다. 이런 사실을 성찰할 때 나는 다시 한 번 세상의 시인이 될 의무로 새로와 진다.

그 러므로 이 땅의 말을 함부로 썼구나 하는 뼈ㅏ픈 회고도 회고려니와 이와 함께 내가 아프올 써야 할 말이 두려운 바 있다< 바로 이 두려움으로부터 나는 거듭나야 할 운명을 본다. 생각컨대 이 땅의 삼천리 강산 위에 내가 살고 있음이 엄연하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시인으로 사는 일을 다할 터이다. 시가 죽으면 진실이 죽는다. 노예로부터도 모험으로부터도 시를 살려내지 않으면 안된다. 능히 역사의 이름으로 그래야겠다.

나의 20대부터 50대에 이르는 동안 내 시의 행로 또한 다단한 바 있었다. 나는 방랑의 시대를 살았다. 그것은 동족상잔의 내전으로 인한 폐허를 떠도는 자의 역사에 대한 무책임을 자유로 착각한 전후 세대의 삶이었다. 허무가 내 청춘의 권리였다. 나는 6. 25로 산에 들어 갔고, 4. 19로 산에서 내려왔다.

역사는 이런 나의 삶에 각성을 요구했다. 그 요구를 발견했을 때의 나의 감격은 아직가지도 선명하다. 70년대로부터.

더러 시련이랄 것도 없는 시련을 겪은 셈이기도 하지만 그것이 어디나 혼자 겪는 것도 아닌 바에는 도리어 그 시련 가운데 내 시의 원천이 있음을 알게 된 기쁨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내 가 서사시 "백두산"을 비롯한 다른 계획들과 함께 꿈꾼 것이 이 "만인보"이다. 80년대 백두 남한산성 아래에서 살 때 이 계획이 떠올랐다가 이제야 그 꿈이 실현됙 시작한다. (나는 이제 서구시의 외세로부터 해방된 것이다. 이 말 한마디에 내 긍지의 전부가 들어 있다.

지 전작시편 "만인보"는 막말로 말해 내가 이 세상에 와서 알게 된 사람들에 대한 노래의 집결이다. 나의 만남은 전혀 개인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공적인 것이다. 이 공공성이야말로 개인적인 망각과 바임으로 사라질 수 없는 것이며, 그것은 삶 자체로서의 진실의 기념으로 그 일회성을 막아야 한다. 하잘 것 없는 만남 하나에도 거기에는 역사의 불가결성이 있다. 

이 같은 원칙이 나에게 길들여진 바 사람들의 서사적인 숭엄성으로 되고 거기에서 이 시편이 나온 것이다. 여기세는 사람의 추악까지도 해당되어야 했다. 소위 진선미만으로는 사람을 다 밝힐 수 있는 때는 사실인즉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 그것은 위선에만 있기 때문이다.

우선 내 어린 시절의 기초환경으로부터 나아간다. 그것은 다음 단계인 편력시대의 여려 지역과 사회 각계 그리고 이 땅의 광막한 역사와 산야에 잠겨 있는 세상의 삶을 사람 하나하나를 통해 현재화할 터이다.

이는 결국 가서 민족의 동시적 형상화가 들어 있어 마땅하다. 따라서 민족 생명력의 전형화 역시 덤으로 기대하고 있다.

그러니까 이 작업의 계속은 나의 사람에 대한 끝없는 시적 탐구이자 이름없는 역사행위이고자 한다. 시인이 역사의 곤능 없이는 살 수 없느 연유이겠다.

한마디로 덧부틴다면 서사시 "백두산"은 사람을 총체화하는 것인 반명 "만인보"는 민족을 객체의 생명성으로부터 귀납하는 수작이라고 해야겠다.

지난 20년 동안 이 땅의 문학과 민족현실의 엄정한 진로를 개척해 온 창작과 비평사가 죽었다가 살아나 그 이름 두 자만이 남겨진 채 다시 일을 하기 시작하는 이토록 감회 깊은 판에 이 책이 나오게 된 점을 나는 마음 속에 아로새기고 있다. 우리는 넓다. 우리는 그 무엇보다 길다.

 

1980년대 복판을 지나며

고은

 

 

 

30 ans que ma vie est habitée par la Poésie. C’est le temps qui m’a fait m’apercevoir, qu’écrire un poème en langue de ce pays, est certainement plus une urgence ici qu’ailleurs, c’est ainsi la période est sombre.

      Un jour j’ai même pensé que c’était s’enchaîner que d’écrire un poème en langue de cette terre, tout comme la réalité, je me suis aperçu que les deux ne font qu’un, de sorte que je suis parvenu à comprendre que la poésie est le résultat de l’histoire. 30 ans qui ne m’ont pas été une peine, même pour l’humble que je suis.

 

      Je remercie profondément, avec un sentiment de culpabilité*(gêne), les lecteurs qui tolèrent mes poèmes comme poésie durant tout ce temps. C’est une grande faveur de m’avoir reconnu comme poète. Ce fait renouvelle chaque fois le devoir qui m’est imposé de devenir un poète de ce monde.

      Par conséquent, cela me fait rappeler douloureusement que j’ai utilisé la langue de ce pays négligemment, et aussi me fait avoir peur pour les mots que je devrais écrire demain. De cette peur-là même je vois mon destin renaître. Il est clair que j’habite cette terre, sur les montagnes et rivières du pays. Quoi qu’il arrive, je vais vivre comme poète. Si la poésie meure, la vérité meure. 1) Il est indispensable de sauver la poésie d’être l’esclave et l’aventuré. Il me faut le faire au nom de l’histoire, nécessairement.

 

      De ma vingtième année jusqu’à la cinquantaine,  la voie de ma poésie a été mouvementée. J’ai vécu une époque d’errance. C’était la vie d’une personne de la génération après guerre, une personne qui a erre en ruine à cause de la guerre civile fratricide, qui confondait sa liberté avec l’irresponsabilité dans l’Histoire. Le néant était le droit de ma jeunesse. Je suis allé dans la montagne avec le 6.25, et d’y sortie avec le 4.19[1].        

      L’Histoire a exigé que je me réveille d’une telle vie. Je me souviens vivement à quel point j’étais saisi de découvrir cette exigence. Depuis les années 1970.

 

   2) J’ai traversé des souffrances, mais qui n’étaient pas uniquement cela ni uniquement le mienne, puisqu’elles étaient aux sources de mes poèmes. J’en ai éprouvé un grand ravissement malgré ce que je vivais.

      C’est ce Maninbo que j’ai rêvé avec l’épopée Baekdusan (Montagne Baekdu) et d’autres projets. Ce projet était conçu quand j’habitais sous Namhansansong au début des années 1980[2], mais ce n’est que maintenant  que je commence à réaliser ce rêve. Finalement je suis libéré de l’influence étrangère de la poésie occidentale. Dans ce mot seul réside toute ma fierté.

 

      Cet œuvre de série, Maninbo est, en gros, une collection des poèmes sur les gens que  j’ai connu dans ce monde depuis que je suis né. Mes rencontres ne sont pas personnelles du tout. En fin de compte, elles sont publiques. 3) Cette nature publique ne peut pas disparaître par l’oubli et la non-intervention personnelle, mais elle est un souvenir de la vérité en tant que la vie même, et il faut l’empêcher  d’être unique. Dans une rencontre futile il y a le caractère inévitable de l’histoire.

      Tel principe, maîtrisé par moi, est devenu la sublimité épique des gens, et de ceci sont sortis ces poèmes. Même la laideur a du être mise dedans. Nulle part dans ce monde on ne peut éclaircir des êtres humains par la vérité, le bien et la beauté, parce que cela n’est qu’hypocrisie.

 

      D’abord, je commence cette série à partir de l’environnement fondamental de mon enfance. Dans l’étape suivante, je vais réaliser à travers chaque personne la vie du monde qui est submergée dans les diverses régions ou j’ai vécu  mes périodes itinérantes, dans les différents terrains sociaux, et dans l’histoire, les montagnes et les champs vastes de ce pays. C’est clair qu’il devra finalement  contenir un façonnement simultané de la nation. Par conséquent, je m’attends aussi, comme en prime, à ce que je puisse faire un archétype de la force de vivre de la nation.

      La continuation de cette tâche serait donc une recherche poétique interminable et aussi bien un acte historique anonyme. C’est pourquoi le poète ne peut pas vivre sans la sensualité de l’histoire.

      Si j’ajoute un mot de  plus, Maninbo est une action*(un travail / une oeuvre) qui induit la nation à travers de la vitalité de chaque individu, tandis que l’épopée Baekdusan façonne l’être humain en totalité. 

      

      Je grave dans mon cœur que cet ouvrage est publié au moment si impressionnant, où  la maison d’édition « Changjakwa bipyong (Création et critique) » recommence son travail avec seulement son nom survécu après sa mort de l’époque. Nous sommes grands. Nous sommes plus endurants que les autres.

 

                                                    En passant le milieu des années 1980,

                                                                                                      Ko Un

        

 

 

 

Vol. 4 (1988)

 

      Finalement, les Jeux d’olympiques de Séoul se sont réjouis seul, en n’embrassant pas Pyongyang. Pendant cette période des Jeux olympiques, J’ai coupé même les lignes de la télévision et de la radio. Cependant, ce que j’ai du faire était écrire.

      Dans cette façon-là, je n’ai pas arrêté de travailler à écrire cet été jusqu’à l’automne. Pour moi donc, les Jeux olympiques ne m’ont évoqué aucun sentiment réel.

      Un des résultats de ces travaux-là est Maninbo. Voila de nouveau, je fais les volumes 4, 5, et 6 de Maninbo naître. Ils seraient environ 330 poèmes. Je suis ému d’une manière, et cela me fait dire la parole suivante.

 

      L’histoire succède non par ceux qui la servent loyalement, mais par ceux qui la renouvellent tout à fait à travers leurs luttes. De là, l’histoire devient la littérature, car la création est exactement l’essence de la littérature. Pour cette raison, je me souviens de mes 30 ans de littérature avec confiance, sachant que la littérature et l’histoire sont forcement une.

      Parfois je me confronte au problème fondamental, à savoir qu’est-ce la littérature. C’est comme d’être blessé au front par hasard. Dans ce cas-là, je suis surpris de nouveau, en remarquant que je suis encore tremblant devant cette question, malgré une certaine chronicité de mes perception et angoisse. De telles questions comme, qu’est-ce que la littérature sur cette terre ou à cette époque, qu’est-ce que la littérature en effet peut faire, se succèdent indéfiniment dans ma tête.

      Néanmoins, je refuse, en y étant attaché, à faire une réponse pour me soulager tout de suite. 1) Le doute sur la littérature alimenté par ce refus finalement se transforme en confiance. Oui, c’est ça.

      Aujourd’hui, je suis convaincu que la littérature fonctionne dans l’histoire comme la meilleure forme de vie, dans laquelle sont contenue mon errance depuis des années 50 et mon défi des années 70, et je vais élever (ma littérature – PSH) de ces périodes en plus haut niveau. Je dois vivre, vraiment, avec la résolution de garçon.

   2) Pour autant que la littérature nationale, dans laquelle je participe humblement, obtienne la légitimité de la littérature de cette terre par son développement, pour autant cette littérature qui n’est pas différente de l’histoire, réalise le bonheur de la nation. Alors, quoi de plus justifie !

      

      Le temps est déjà passé. L’avant dernière année, c'est-à-dire, en hiver en1986, j’ai publié les volumes 1, 2, et 3 de Maninbo. C’était lorsque la maison d’édition « Changjakwa bipyong (Création et critique) » a à peine survécu sous le nom de « Changjak (Création) ». Comme j’ai fait mention du motif et du début de Maninbo de ce temps-là, je ne vais pas le répéter.

      Cependant, quoique j’ai voulu écrire plus que 3 volumes chaque année, j’ai passé l’an dernier en écrivant l’épopée « Baekdusan », donc après cette année là, arrivent les volumes 4, 5, et 6 que j’enterre dans ce monde.

      Si le devoir de cette époque n’avait été que de m’appliquer à écrire, j’aurais pu finir Maninbo jusqu’au volume 10. C'est-à-dire, un tiers, car il se composerait de 30 volumes en total par plan.

      Toutefois, l’ordre sévère de l’époque a donné des choses à faire même à une personne *dans l’action littéraire comme moi, par conséquent il ne m’a pas été permis de me concentrer et de rester au bureau.

      J’ai du activement me joindre au rang pendant la Lutte de Juin[3] l’année dernière. Je n’avais pas de larmes mais les grenades lacrymogènes m’ont changé en pot de larmes. C’est bizarre. Depuis cela, j’ai pu répandre des larmes selon mes émotions.

      J’ai du encore apparaître fréquemment à l’occasion des activités de différents milieux, aux nombreuses universités et associations dans le pays. Par ailleurs, ce n’est pas tellement facile de tenir, avec les camarades, le ménage de ‘L’assemblée des écrivains de la littérature nationale’, un résultat de la Lutte de Juin. Même si j’avais plusieurs corps, cela ne serait pas assez, pourtant j’en ai qu’un seul. Pendant cette époque, je me rends compte du champ de parcourir par le cheval au galop comme si les vivants entreprennent même les rôles des morts.

      Pour que j’aille en ligne droite, en ne m’égarant pas sur le processus de ce chemin dont la fin n’est pas connue, ma littérature doit être vive. En particulier, la lutte contre le dogmatisme est en accord avec la lutte contre les contradictions. Juste à ce mouvement s’impose la vie. Non en tant que héro, mais en tant qu’être qui révèle la vérité.

                                                                                             

      Par Maninbo, je voudrais sortir de l’époque de mon lieu natal  le plus vite possible. Le lieu natal est aussi une décadence. Il en est plus ainsi si l’on ne le transfère pas au présent de l’histoire. Toutefois, ils restent encore un ou deux volumes des gens de ma ville natale. Ils sont peut-être des poissons qui attendent d’être transférés de la stagnation à l’eau courante.

      De toute façon, pour un peu dépasser la situation où je reste toujours dans mon lieu natal, j’expose une autre scène séparément de celle de mon village natal. C’est 33 poèmes qui sortent chaque mois. Ce n’est pas ma propre expérience, mais c’est l’addition de mon expérience imaginaire et de la séduction qui rejoint l’universalité que n’importe qui a sur cette terre. La société de l’expérience et de l’imagination est la vraie société de la création.

      Subitement, ici, on emploie le mot « nation (gyoré)[4] ». Autant que notre nation*(gyoré) existe, je voudrais que mon Maninbo soit vivant, en ruminant ou songeant à la dignité de chaque compatriote*(gyoré) partout dans la nation*(gyoré). La littérature fait d’abord mon existence. Qu’aurais-je pu faire s’il n’y avait pas la littérature !

      Dans ce sens, je suis un défenseur permanent de littérature, avec émoi depuis l’age de 20 ans.

 

      Après tout cela, je trouve qu’il y a des choses que je n’ai pas. Ni la modestie, ni l’arrogance des hauteurs. Est-ce que c’est une marque de décadence ?

 

                                                                                   Automne, 1988                                                        

                                                                                                 Ko Un

 

 

 

 

Vol. 10 (1996)

 

      Dans le désert, une étoile devient le voisin de l’homme beaucoup plus qu’aucun endroit haut.

  

      Il faudrait se demander ce que sont les existences de la poésie et du poète au temps où ça et là les époques marquantes sont déviées de grandes propositions. C’est une question non seulement fondamentale mais aussi vivement réelle.

      Pourtant, après avoir arrêté ce genre de question, indépendamment du soupçon de telle idée, je suis arrive à penser au  problème de l’humain d’abord.

      Par conséquent, j’ai du ouvrir mes yeux à nouveau sur le fait que la compréhension intégrale de la nature, de la société, de l’histoire, et de la civilisation en tout arrive finalement au problème de l’humain. 1)Y compris le fait que seulement la purification ou la sublimation existentielle de l’humain pourront ébaucher un dépassement de toutes les moments difficiles accumulés jusqu à maintenant.

   2) Il n’y a jamais eu une période comme aujourd’hui, où les phénomènes humains divers sont autant débordés par un état sans catharsis.

      En conséquence, je mets un grand espoir dans ‘l’homme poétique’, qui est, différent d’être poète, modèle fondamental de l’humain en devenir.

 

      Seulement après cela, on pourrait donner une signification de la poésie et du poète libéralement, ne s’attachant pas aux poétiques précédentes.

      J’espère que vous ne hochez pas la tête, en vous demandant si ‘l’homme poétique’ a vraiment la possibilité comme un présage d’exister dans ce monde. Juste ça, dans cette situation on pourrait entendre la marche de l’homme poétique d’abord, que celle du poète. On ne sait jamais.

      Simplement, ressentir de telle personne une affinité d’amoureux plutôt que de messie est relié à la bénédiction de création.

 

      L’intervalle de Maninbo depuis six ans a aidé celui qui doit continuer ce travail-là à surmonter la première personne poétique à certain degré.

   3) Parce qu’il est possible de supposer le piège de tomber dans le subjectivisme en ce qui concerne le choix ou l’omission des caractères dans Maninbo.

      En outre, les contenus des volumes 10, 11, 12 publiés cette fois, sont des parties arbitraires des années 70, 4) et il manque la filtration du temps pour que ces contenus soient actualiser.

      A côté de ces trois volumes, on pourrait mettre bout à bout des portraits de diverses sortes des années 70. De toute façon, je ne ferai pas attention si vous lisez cette série de poèmes comme la littérature ou comme l’époque. Justement, je n’ai pas pu ne pas dessiner les gens des années 70 dans le cadre des années 70.

      Je suis passé sur la guerre d’échec historique, la guerre fratricide des années 50, et sur toute la période de vie des années 60, que je n’avais pas encore touché. C’est pour ainsi éviter de donner l’impression que les travaux de Maninbo garde trop les étages chronologiques.

      Depuis 1989 ou j’avais publié jusqu’au volume 9, j’étais dans la situation d’arrêter. C’est parce que, même si je peux m’excuser de m’être occupé d’autres affaires cependant, d’autre côté je crois qu’il est mieux de faire ce genre de travail plus âgé.

      Dans ce cas-là, même tempête et élan de l’époque aussi peuvent *fermenter complètement.

      Toute fois, à partir de l’année prochaine, je ne sauterais presque pas l’an du travail de Maninbo.

 

      Dans le pays de Keum du clan Yeojin à l’ancienne époque, il y a une légende de deux lotus sortis d’une même racine. Un couple deux jeune homme et femme ont prêté serment de leur amour, mais ils n’ont pas été acceptés par le monde, de sorte qu’ils ont plongé dans l’étang pour combler leur amour sans avoir d’autre choix.

      A cette année-là, il y avait plein de lotus, et chaque racine en portait deux. Depuis ce temps-là, le pays de Keum considère le lotus comme la fleure d’amour.

      Sauf le concept bouddhique où le lotus signifie un monde de pureté, ou bien la légende de Keum où se trouve le sens du lotus en liaison de l’amour tragique, existe une sphère vaste, dans laquelle on pourrait interpréter cette fleur comme un tout à fait différent objet.

      J’espère fortement que Maninbo, de cette façon, n’est pas un travail de moi seul, mais un travail en collaboration, produit par les émotions et les discours des endroits divers.

      Aussi le temps où l’histoire ne peut pas être juste personnel, et donc public.

 

      Je remercie des corrections de M. KIM I-Gu, M. SHIN Chae-Yong et Mme. KIM Seong-Eun à la salle de rédaction.

 

                                                                                             A la fin de l’automne 1996,

                                                                                                                              Ko Un

 

[1] « Aller dans la montagne » signifie « aller au temple bouddhique pour devenir moine ».

6.25 est la guerre civile coréenne commencée au 25 juin, 1950, et 4.19 est une révolution qui a eu lieu en 1960 par le peuple contre la dictature du gouvernement de Seungman Lee pour obtenir la démocratie.

[2] C'est-à-dire que Ko Un a conçu Maninbo quand il s’était assis dans la prison de l’Armée qui se situe à Namhansansong à cette époque-là.

[3] La grande lutte pour la démocratisation qui était durée pendant tout le mois de juin en 1987. C’est un point remarquable dans l’histoire contemporaine de Corée.

 

[4] « Gyoré » est un mot propre coréen, qui signifie la « descendance » d’un même ancêtre. Il peut être traduit ainsi comme « nation », « peuple », « ensemble des compatriotes », mais il y a une nuance plus affective et aimable qui ne soit pas traduit en une autre langue.

 
 

Autour du texte:

Academy of Korean studies Inalco Université Paris Diderot-Paris 7 EHESS